제목 달마 이야기 ⑩ 반야다라의 방문 날짜 2016.12.10 11:04
글쓴이 무법정사 조회 774

왕궁으로 돌아온 보리다라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경전조차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달빛 아래서 무술연마도 하고 싶지 않았다.

촛불을 끄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는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시적인 방편으로 왕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궁성 안의 호화로운 생활이 스스로를 옥죄었다.

게다가 부왕과 모후에 대한 괴로운 심정도 마음을 짓눌렀다.

그럴수록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이불 속에 반듯이 누운 보리다라는 어느덧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벼락이 하늘을 진동하면서 한 줄기 붉은 빛이 그를 엄습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무너져 내린 왕궁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타다 남은 가재도구가 뒹굴고 궁 안은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다.

도처에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피비린내와 시체 타는 냄새가 코끝에서 진동했다.

짐작컨대 이 나라가 외국의 침략으로 겁난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업보로다, 업보!” 보리다라는 명상 속에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두 손 모아 합장했다.

잔인한 살인, 파괴, 피 뿌리는 겁난, 인과응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윤회의 굴레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량겁 이전에 위대한 자비의 원력(願力)을

인식하고 시방세계를 교화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행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보리다라는 한 줄기 쏴한 냉기에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퍼뜩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벌써 한밤중인 듯 싶었다.

창 밖엔 명상 속에서 본 것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몸에선 식은땀이 흘러 이불과 요를 흠뻑 적셨다. 보리다라의 마음은 산란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밤이 깊었건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엔 명상 속에서 본 광경과 오늘 낮에 부왕이 하신 말씀이 중복된 화상으로 어른거렸다.

그는 고개를 힘차게 흔들면서 환영(幻影)을 쫓았다.

‘아, 이것이 일장춘몽이로구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새벽이 밝았다. 왕궁 안의 누각과 집들이 동트는 햇살에 비쳐 막 솟아올랐다.

밤새 내린 빗방울은 건물 사이 처마 겹겹에서 영롱한 빛을 반사했다.

향지국 도성 안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한껏 돋보였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향지국왕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문안드리러 온 세 왕자와 내관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궁전을 나섰다.

한참 걸어서 옛 성(城)의 망루에 올랐다.

고색찬연한 왕도(王都)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기도 했거니와

세 왕자와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세 왕자와 함께 막 자리에 앉자 내관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달려왔다.

“대왕께 아룁니다. 성문 앞에 웬 노스님이 오셔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내관이 부복해서 고하는 말에 국왕은 귀를 의심했다.

이른 아침부터 노스님이 찾아 온 까닭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순간 국왕은 길조로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노스님을 즉시 이곳으로 모셔라.” 잠시 후 내관이 스님을 안내했다.

스님은 키가 8척이나 되는 장신이었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동안(童顔)이었다.

굵은 눈썹에 맑은 눈이 총총히 빛났다. 어디로 보나 도골선풍(道骨仙風)이 풍겼다.

손에 불자(拂子)를 잡은 채 국왕을 향해 합장하면서 말했다.

  “대왕을 처음 뵙습니다. 아미타불.”

향지국왕은 불교를 존숭하는 임금이었다.

황망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내려가 스님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다.

“노사부께서는 몸을 펴십시오. 그리고 이리 앉으시지요.”

노승은 사양하지 않았다. 곧 국왕과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국왕은 노스님을 흘깃 보면서 고승(高僧)이 확실하다고 짐작했다.

노사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성지를 내려 보물을 시주하라고 했다.

내관은 즉시 은쟁반에 금은보화를 담아와 정중하게 노승의 앞에 바쳤다.

향지국왕은 쟁반 위에 놓인 보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희 나라가 형편이 여의치 않습니다.

보잘것 없는 보물이지만 등에 넣을 기름값으로나마 보태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기꺼이 받아 주십시오.”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쟁반을 받아서 옆에 있는 책상 위에 놓고 몸을 일으켜 합장을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히 대왕의 시주를 받자와 빈승은 실로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말을 마치자 노승은 눈을 들어 옆에 앉아 있는 세 왕자를 차례로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었다.

무슨 사연이 담겨있는 듯 싶은 그런 눈길이었다.

국왕은 세 왕자로 하여금 노승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런 다음 노승에게 물었다.

“노사부께서는 어느 절에 계시온지요? 그리고 법호는….”

노승은 국왕이 채 말도 마치기 전에 불자를 한번 쓸어 내리고는 합장을 하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빈승이 바로 천축 27대조인 반야다라(般若多羅)입니다.

정해진 거처는 없습니다. 대왕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중하시고 공덕이 무량하다는

말씀을 듣고 그 이름을 흠모하여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과연 공연한 소문이 아니었군요.”

향지국왕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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