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달마 이야기 ① ( 본 내용에 앞서 이야기를 쓴 가닥 에 대한 글 ) 날짜 2016.08.03 15:24
글쓴이 무법정사 조회 1219

달마의 한자표기는 두 갈래로 쓰인다. 達摩와 達磨가 그것이다.

앞의 마(摩)라는 글자는 ‘연마한다’는 뜻이고, 뒤의 마(磨)는 ‘숫돌에 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글자의 근본적인 뜻은 ‘갈다’는 점에서 같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앞의 ‘마’는 손(手)으로 ‘갈다’는 뜻이고,

뒤의 ‘마’는 돌(石)로 ‘갈다’는 정도이다.

어쨌거나 ‘갈다’는 행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을 터이다.

물론 손과 돌은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손과 돌이 별개가 아니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비로소 ‘참’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의 우리가 ‘달마’라 부르는 이름은 범어 보디 다르마(Bodhi Dharma)의

한자 음역을 우리식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두 가지의 한자 표기를 모두 쓰고 있다.

오히려 돌(石)을 가는 마(磨)자가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어쩌면 일본 불교의 영향일는지도 모른다.

일본말사전에 보면 어김없이 달마 곧 達磨로 쓰여 있다.

일본말사전이 그처럼 고집해서 쓰는 까닭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달마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풀이에 따르면 어떤 ‘마’자를 쓰느냐의

문제는 결국 달마관(觀)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달마에서 마(摩)를 쓰는 쪽은 달마를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인식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서 마(磨)를 쓰는 쪽은 비실존적인 신비스런 존재로서 달마를 내세운다.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의 글을 보면 달마에서 마(磨)자를 쓴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선맥의 굴곡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 . . .

달마의 일생은 비록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진법은 단순명쾌한 것이 특징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이 달마의 가르침이다.

소설 달마에선 이야기가 복잡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달마선법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은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달마는 이른바 ‘부활(復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달마의 주검은 웅이산(熊耳山)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무덤에는 짚신 한짝만 남았고 본래의 몸은 되살아났다.

이것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는 엄청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달마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수행자에 주는 의미는 과소평가되거나 간과돼서는 안된다.

내가 소설 형식을 빌려 달마이야기를 쓰는 참뜻은 바로 달마의 새로운 부활론을 엮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의 달마이야기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 터이다.

시공(時空)을 초월해 하나(一)의 진법을 펼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를 깊이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다.

더군다나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처럼 어떤 깨달음을 얻은 처지도 아니다.

그저 글을 즐겨 쓰는 한 사람의 언론인일 따름이다.

다만 인연이 있어 달마를 찾아 무수히 헤맸다.

마침내 환영 속에서나마 그 옷깃의 바람소리를 알아 차렸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것이 내가 달마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의 한 가닥이다. . . .

현대불교신문에서 달마이야기를 연재한 '이규행'님의 말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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