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1차 반야심경(般若心經) 강의 날짜 2016.06.06 21:16
글쓴이 무법정사 조회 1086

제1차 반야심경(般若心經)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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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야심경의 참뜻

반야심경 참뜻은

연기(緣起) 이전의 법과 연기(緣起) 이후의 법,

두 갈래의 법, 내용을 중생들에게 포교하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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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하(摩訶)

마하(摩訶)의 법(法)은

‘어느 때부터’가 아니고,

하늘 땅 이전 연기 이전의 법이고,

본래부터 무한대로 크고 밝은

밝아있고 깨어있다는 법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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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摩訶)의 뜻을 다시 재론한다면

마하(摩訶)라는 말은 인도 언어인데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본래지(本來知)이다.

본래지, 본래지법(本來知法)은

본래부터 밝아있고 항상 영원무궁토록 깨어있어

연(緣)을 만나기 전은 고요하고 고요한

적적(寂寂), 무반응(無反應)이지만

연(緣)을 만나면 즉각 반응할 줄 아는 기능이 있다.

마하(摩訶)의 뜻을 다시 또 재론한다면

마하의 본뜻은 ?(영)이다.

허무적인 ?이 아니고, 긍정적인 ?이다.

?이 곧 본래지의 마음이다.

본래부터인 ?이기 때문에

본래부터인 법(法)이기 때문에

?은 세세생생(世世生生)불변이다. 불멸(不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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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세세생생 더한 것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은 형상이 본래부터 없다.

아무 모양이 없다.

아무 색깔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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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본래부터 형상이 없고

아무 모양이 없고, 아무 색깔이 없지만

연(緣)을 만나면 즉각 반응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형상과 모양으로

색깔이 발전되고, 형상들이 발전되고

삼라만상(森羅萬象)으로 발전된다.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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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십이연기법 이전이다.

본래부터 밝고 밝은 본래지 ?에는

십이연기법이 본래 없다.

연기법(緣起法) 이전이기 때문에

십이연기법이 없으니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다.

윤회(輪廻)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으니

세세생생 항상 따뜻한 우리들의 큰 집이다.

?(영)이 중생 중생들의 안식처(安息處)이다.

의지처(依支處)이다.

중생 중생들의 따뜻한 고향이다.

중생들의 기도처(祈禱處)이다.

아무 형상이 없고 모양이 없는 법으로는

중생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불상(佛像)을 모시는 포교 방편(方便)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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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부처님들은 역사적인 부처님들이 아니고

본래부터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는 부처님의 참 법(法)을

중생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한 방편으로

불상(佛像)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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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佛像)의 내면에는

본래부터 항상 밝아있고 깨어있는

부처님의 법(法)이 밝혀져 있으니

불상 앞에 예경(禮敬)함이

절대로 잘못된 법(法)이 아니다.

연기법 이전 본래부터 밝아있고 영원토록 깨어있는

?(영)의 위신력(威神力)을 두고

밖으로 표현하는 수많은 존칭어가 있다.

첫째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법신(法身), 법신불(法身佛), 자성불(自性佛),

진여(眞如), 진여불(眞如佛), 여여(如如),

진공묘유(眞空妙有), 고명영지(孤明靈知),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등 ?은 하나이지만

밖으로 표현하는 존칭어는 여러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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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지법(本來知法)을 다시 또 재론한다면

‘어느 때부터’가 아니고 ‘본래(本來)부터’인

신비(神秘), 극비(極秘), 만고불변(萬古不變), 불멸(不滅),

세세생생 한결같은 종교(宗敎)의 근원지(根源地)로서

지혜지(智慧智)가 아니라

본래지(本來知)인 알 지(知), ?이다.

?이 태초(太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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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太初)인 ?에서 인연법(因緣法)으로

12연기(十二緣起)가 이어져

삼라만상(森羅萬象), 중중무진(重重無盡)이 펼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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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야(般若)

지혜(智慧)가 반야이다.

마하(摩訶)가 ‘본래부터’인 반면에

반야(般若), 지혜는 ‘본래부터’가 아니고 ‘어느 때부터’이다.

본래지(本來知)의 마음인 ?(영)은

지상 위 하늘 아래 단 하나이지만

반야 지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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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지, 알 지(知)는 중생 중생 모두가 다 같다.

다 같아서 다르지 않다.

백이면 백, 이백이면 이백

모두가 알 지(知)는 다 같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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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면 찬 줄 아는 것이 지(知)이다.

따스하면 따스한 줄 아는 것도 알 지(知)이다.

억만년 전에도 따스하면 따스한 줄

차면 찬 줄 아는 것은 알 지(知)이다.

억만년 전의 지(知), 알 지(知)나

억만년 후 현재의 지(知), 알 지(知)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본래지(本來知), 알 지(知)이다.

?

본래지(本來知)는 영원불변(永遠不變)이다.

영원불멸(永遠不滅)이다.

영원히 불변이고, 불멸이기 때문에

본래지(本來知), 알 지(知) ?(영)이

중생 중생들의 종교이고

의지처(依支處)라는 논리(論理)가

허점(虛點)이 없지 않은가 다시 반문(反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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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의 근원지(根源地) 위신력(威神力)을

바로 알고 바로 전함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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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지(智慧智)는

‘본래부터’가 아니고 ‘어느 때부터’이기 때문에

백이면 백, 이백이면 이백 모두가 다 같은 하나가 아니다.

백이면 백, 이백이면 이백 모두가 다 같지 않다.

이백 명 생각이 다 다르고, 습(習)과 업(業)이 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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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지(本來知)는

억만년 전 본래지가 현재 그대로이지만

지혜지(智慧智)는 억만년 전 지혜(智慧)가 아니다.

지혜지는 그때그때 시대 따라

가치관(價値觀)이 달라지고 변해간다.

지혜지는 어제의 지혜가 다르고

오늘의 지혜가 다르게 계속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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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변하고 변하는 지혜지(智慧智)라 하더라도

이 지혜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본래부터 밝고 밝은 본래지(本來知)를

바로 알고 바로 아는 것이 지혜지(智慧智)이니

본래지(本來知)를 바로 아는 지혜지(智慧智)가 없으면

본래지를 바로 믿고, 신(信)하고,

바로 섬길 줄 아는 공덕(功德)을

등지고 사는, 배신하고 사는 삶이 된다.

축생과 같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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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지(智慧智)가 있으므로

본래지의 위신력을 바로 알고, 바로 신(信)하고,

바로 섬겨 복(福)과 덕(德)이 구족한 지혜자(智慧者),

복지자(福祉者)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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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지(本來知)만 있고 본래지에만 치우치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미신자(迷信者)가 된다.

또, 본래지(本來知)가 없고 지혜지(智慧智)만 있으면

종교심(宗敎心)이 없고,

따뜻하고 포근한 정(情)이 부족하여

상대를 비판만 하고 비판밖에 모르는

박덕자(薄德者)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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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학과 종교

본래지(本來知) ?(영) 알 지(知)는

사람이나 축생, 미물곤충이나 다 같지만

축생(畜生), 미물곤충(微物昆蟲)에게는 사람과 같은

지혜지(智慧智)가 부족(不足)하다.

사람만이 지혜지(智慧智), 지혜의 능력이 풍부하기에

과학(科學)이 있어 다른 축생들보다 편리하게 산다.

과학은 삶의 편리(便利)이다.

축생들에게는 과학이 없다.

그러나 과학은 삶의 편리(便利)일 뿐이지

부족(不足)함이 없는 행복(幸福)의 복지(福祉)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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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科學)은 편리(便利)를 주는 지혜이지

영원한 안식(安息)을 주는 종교는 아니다.

중생 중생들의 따뜻한 의지처(依支處)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있으니 종교는 없어도 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종교가 태초(太初) 중생들의 본래지(本來知) 마음이다.

마음 건강이 태초(太初)이지 과학이 태초(太初)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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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항상 건강하게 펄펄 생생(生生)해야 한다.

마음건강 가르침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본래지(本來知)의 뜻과 지혜지(智慧智)의 뜻,

양쪽을 다 포함한 것이 반야심경의 공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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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지(本來知)의 알 지(知)는 종교적인 위신력이고

지혜지(智慧智) 차원은 철학적인 차원이다.

종교(宗敎)와 철학(哲學)이 함께하니

불교는 중생계에 가장 지혜가 넘치는 복덕(福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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