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불교근본교설] 부처님의 생애 6 - 6년간의고행 날짜 2013.04.17 11:55
글쓴이 무법정사 조회 1459

6년간의 고행

 

드디어 태자는 위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누구를 찾아서 진리를 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홀로 수행하고자 당시의 많은 사문들이 모여 고행하고 있는 가야지방의 네란자라강 근처의 고행림(苦行林)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행림에 도착한 태자는 벌써부터 자기를 따르던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의 동료들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피나는 고행을 하였다.
고행림에는 자이나교도들과 그 외의 많은 사명외도(邪命外道)들이 모여 고행을 닦고 있었다.
이때 태자는 나무씨 한알, 쌀 한톨, 물 한 그릇으로 목숨만을 유지하면서 피나는 정진을 했다.

이러한 태자의 모습을 지켜본 어느 사람이 왕궁에 있는 정반왕과 양모, 그리고 부인인 야소다라에게 알렸다.

왕은 혹시나 태자가 저러다가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차익을 시켜 많은 음식과 의복을 보냈으나 끝내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때 태자의 모습을 불전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피골이 상접하고 핏줄이 통채로 드러났다.'
태자는 차익의 권고를 물리치며,
"내가 부모의 뜻을 어기고 멀리 이곳까지 와서 수행하는 것은 오직 지극한 도를 얻고자 함인데 어찌하여 그런 호화로운 공양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잘라 말하면서 계속하여 단식과 고행으로 일관하였다.

태자는 야윌대로 야위고 호흡은 마치 팔 구십이나 먹은 노인과 같았으며 제대로 서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
두 눈은 움푹 들어갔으나 눈빛만은 더욱 반짝였다.

우루빌라 고행림에서 고행하고 있는 태자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다시 정반왕의 귀에 전해졌다.

카필라성의 모든 사람들이 태자의 목숨만은 구해야 된다고 떠들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태자를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태자의 돌이킬 수 없는 굳은 결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다.
이때 카필라성 국사의 아들 우다이가 태자를 설득하겠다고 나섰다.

정반왕은 우다이에게 '네가 만약 태자를 데려오지 못하면 두 번 다시 나를 볼 생각을 말라' 고 엄명을 내려서 보냈다.
우루벨라의 고행림에 도착한 우다이는 태자를 만나기 전에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서 항상 태자의 곁에서 시봉을 하고 있던 아사유시(아습시)에게 태자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사유시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는 감히 당신이 왕궁에서 태자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태자가 출가하여 고행한 지 거의 6년이 지나도록 고향땅인 카필라성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우다이는 할 수 없이 직접 태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태자는 지쳐 땅에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진흙투성이고,

옛날에 빛났던 모습은 사라지고 몸은 흙빛이었다.

몸이 무척이나 수척하여 뼈만 앙상하게 걸려 있으며 눈이 움푹 들어가 마치 우물이 패인 듯하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걸음을 걸으면 뼈 마디마디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아 보였다.
이러한 태자의 모습을 본 우다이는 차마 볼 수가 없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듣게된 태자는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그렇게 슬피 울고 있느냐?"
"태자이시여, 나는 태자의 고향인 카필라국 국사의 아들 우다이입니다. 정반왕께서 저를 보내시어 태자를 모셔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너 우다이야, 나를 번민케하는 사신은 필요하지가 않다. 나는 오직 나를 열반으로 인도해 줄 사신만이 필요할 뿐이다."
"태자시여, 당신의 서원은 왜 이다지도 굳세기만 합니까?"
"내 몸이 여기서 부서져 마치 새똥처럼 되고, 백골이 먼지 가루가 되더라도, 만약 깨달아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얻지 못하는 한 내가 정진하는 마음을 버리고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서원이다."
"태자이시여, 저는 대왕님께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자를 모시고 함께 왕궁으로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태자의 서원이 그러하오니 당신의 서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왕궁으로 돌아가 대왕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너 우다이야, 내가 만약 여기에서 서원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서 목숨을 마치거든 나의 시체를 가지고 가서 말이나 전해다오.

이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끝내 목숨을 버린 사람이라고 말해다오.

우다이야, 우리 아버지 정반왕에게도 왕자는 이미 한번 세운 서원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은 것이지 결코 게으름을 피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오니,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죽은 사람의 목숨은 비록 끝났으나 그것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고 말이나 해다오."
이처럼 굳은 결심을 우다이도 돌릴 수가 없음을 알았다. 태자는 오히려 우다이를 달래며 타일렀다.
"너 우다이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나는 너와 더불어 친구가 될 수 없다."
우다이는 혼자 숲을 나와 왕궁으로 돌아가 태자는 아직 건강하고 죽지는 않았다고 말하여 정반왕을 근심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거의 육년이 되도록 극도의 고행을 하였어도 해탈은 커녕 오히려 육신만을 해칠 뿐 아무 것도 얻은 결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태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오던 고행위주의 수행을 버릴 것을 결심하였다.

이것은 흔히 사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루에 삼씨 한알, 쌀 한톨을 먹거나 나아가 7일에 한번씩을 먹으면서 몸이 수척하여 마치 고목처럼 되면서까지 고행하기를 거의 6년이나 했지만

해탈을 얻지 못했으니, 이런 고행은 바른 수행이 아님을 알겠다.

차라리 옛날 내가 농경제에 나갔다가 한적한 곳의 염부수 아래에서 명상에 잠겨 욕심을 떠나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했던 것이 가장 참되고 올바른 것이었다."


불타께서 훗날 고행을 버리게 된 동기를 술회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문 바라문이 고행을 닦을 때 몸을 핍박하여 고통을 받는 것은 다만 자기 몸만 괴롭힐 뿐 도대체 이익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행이란 깨달음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고통으로 고통을 끊고 열반을 이루어 도를 닦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반드시 다른 수행으로 생노병사의 고통을 끊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태자가 출가하기 전 염부수 아래에서 법열을 얻었을 때를 회상하고 수행의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의 고행이라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못됨을 알게된 태자는 다시 몸의 건강을 회복하여 고행이 아닌 길을 걷고자 하였다.

 
당시의 고행주의자들은 목욕도 하지 않고 단지 목숨만을 유지할 정도로 음식물을 섭취하며 잠자리를 편하게 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바로 신성한 고행을 포기하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이제까지의 고행을 말끔히 버리고자 니련선하에 들어가 온 몸의 때를 씻었다.

지금까지의 극심한 고행으로 기력을 잃어버려 자기의 힘으로 냇물에서 땅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강가의 나무가지를 잡고서 간신히 올라오게 되었다.
목욕을 하고난 태자는 비로소 공양을 받기로 하였다. 이때 공양올린 사람이 목장집 딸 「난타발라」였다고도 하고, 「수자타」라고도 전한다.

그러나 태자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보게된 교진여 등 5사람의 동료들은 큰 실망을 하고 태자의 곁을 떠나 버리게 되었다.
"사문 고타마가 이렇게 고행을 하고도 무상의 지혜를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좋은 음식을 탐닉하게 되었다. 이제 선정을 버렸다. 그는 이제 게으른 사람으로 타락하였다."
이러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떠나 버렸다.
태자는 공양을 받아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서 마지막 수행길에 들어갔다.

동료들이 모두 자기를 비난하고 떠난 지금 홀로 남은 태자는 보리수 나무 밑으로 가면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저 나무 아래에 앉아 도를 이루지 못한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러한 굳은 결심으로 숲속에 들어가 풀을 뜯어다 자리를 깔고 마지막 정진에 들어갔다.

그때 그늘 삼아 앉은 나무가 「핍바라수」였으나 그곳에서 정각을 이루었다하여 「보리수」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때 깔고 앉은 풀을 길상초(吉祥草)라고 부른다.


출가한 후 6년간의 수행을 고찰하며...
태자는 출가하여 전통적 수행이었던 바라문들의 내세관에 의한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신흥사상가들의 수행방법이었던 고행주의마저도 버렸다.

바라문들의 수행방법을 배우고자한 것은 전통에 따랐던 것이며, 신흥사상가인 사문들의 고행에 동참하였던 것은 새로운 사상적 추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태자는 맹목적인 전통의 굴레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신흥 사상가들의 비판적이며 혁신적인 방법도 옳지 못함을 알고 거부하게 되었다.

사문들의 고행주의는 물질인 육체가 순수 청정한 정신을 덮고 있어서 순수한 정신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정신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육체를 최대한으로 괴롭혀서 그 힘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죄악과 오탁의 현실은 육체가 근본이며 육체적인 물질에 고(苦)의 실체가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즉 고(苦)라는 것도 우리들의 정신영역인 감수 작용과는 하등의 관계없이 불변하는 실체로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해탈을 얻으려면 육신이 소멸하는 죽음 후에나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행주의자들은 고행을 하다가 죽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라문들의 수정주의는 육체의 활동을 멈추고 순수한 정신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깊은 산속에 들어가 오직 명상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명상을 통하여 일시적인 정신적 법열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선정을 벗어나면 다시 고통이라는 것이 현실로 맞게 되므로 그들은 삶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오직 현실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선정이 목적인 것처럼 살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현실의 삶을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열반)를 누리면서 걸림없이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태자로서는

그들의 수행 방법을 모두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태자는 그들의 수행방법뿐만이 아니라 종교 사상까지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는 고(苦)란 불변하는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대할 때 받아들이는 정신 주관이 느끼는 주관적 관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고통이란 어떠한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대상으로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감(갈애)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무명)의 결과이며, 그러한 무명은 현실 인생이 가지는 맹목적인 탐욕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를 중요시하고 맹목적으로 기대하지 않고

우리의 현실적 삶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곳에 해탈과 열반이 있다고 보게 되었다.


현재 많은 불교인들까지도 부처님은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전통적인 수정주의를 버리고 사문들처럼 지독한 고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깨달음을 얻기전에 잘못된 수행 방법임을 알고 완전히 포기하였다.

현실 인생을 바르고 옳게 살아가는 지혜 속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지

현실적인 삶을 버리고 특수한 생활속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라문들의 수정주의를 버림에서 엿볼 수가 있다.
그래서 불교의 실천적인 삶을 중도(中道)의 길이라고 한다. 그것은 불타가 설법하시는 과정에서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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